들어가며
가난에 관한 내 경험을 다루는 글이며 일반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가난이냐면… 이를테면 제주도 수학여행을 못 가지는 않았지만, 수학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모님이 고생을 했을 정도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따라 태권도 학원은 다닐 수 있었지만, 중학교 부터 공부를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지는 않았다. 집을 위해 돈을 일찍 벌려고 특성화고에 진학했지만, 막상 대학교에는 올 수 있었던 정도의(다분히 국가장학금 때문이었다), 그런 정도의 가난에 대한 얘기다.
절대적, 상대적 가난
가끔 젊은 사람이 느끼는 가난 조금 더 일반적으로는 젊은 사람이 겪는 고통에 대해, 옛날엔 더 힘들게 살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마다 얘기하는 ‘옛날’은 제법 다르다. 70년대, 일제 치하, 더 심한 사람들은 가끔 증기 기관이 발명되기 이전 시대를 언급하기도.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본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 그 시대에 살아본 적은 없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조금 웃기는 점을 얘기하자면 내 아빠는 52년생이며, 엄마는 56년생이다. 내 부모님이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대강은 짐작이 가는데, 지금 14평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며, 큰 지병이나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모아둔 돈이 별로 없는 것으로 미루어봐서는 결코 성공적이나,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부모님도, 지금 젊은이들의 삶이 쉽다거나, 너희는 옛날보다 더 편했다던가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옛날 학생들보다 내가 좀 더 게으르다는 얘기랑, 수학공부를 잘 하는게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는 자주 하셨다. (근데 내가 수학공부를 하고 있으면, 무슨 꼬부랑글자만 보고있는데 뭔 수학이냐고 한다.) 가끔 (내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꼰대라는 사람들도 주변으로부터 들은 바로 봐서는, 과거의 결핍보다 지금의 결핍이 더 낫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이를 잘 알기에, 적어도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그런 엄격함을 강요하지 않는 것 같다.
2. 요즘 젊은 사람이 느끼는 열등감에 대해 공감할 수 없다.
이건 나한테 편향이 있을 수도 있겠다. 예전에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한 사람을 내가 마주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할 확률은 무척 적고, 내겐 내 부모 이외에는 표본이 거의 없기 떄문에. 그럴싸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를 극복한 사람이다. “과거는 내가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들지 않았다. 지금은 스마트폰같은 것도 있고, 대학 등록금도 나라에서 빌려주고 옛날보다 훨씬 좋은데, 나는 두 번 세 번도 성공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닐까. 그 사람은 진심으로 이를 사실이라 믿는 것 같다. 사실일 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높은 청년취업률은, 젊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하기 싫어서이고, 사람들이 공무원에 몰리는 것은 도전정신이 없어서이다. 애들이 우울증을 겪고, 힘들어하는 것은 요즘 애들이 군대를 짧게 가서 나약해진 것이다. 이 문장들이 약간 사실을 담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1)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잘 모르고, (2)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면, 원인은 개인에게 있을 확률은 통계적으로 무척 적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뭐 암튼 힘든 건 힘든 것이다.
개인적 경험
사실 절대적으로 살기 좋아진 것은 맞다고 한다. 경제학적으로 그렇다. 경제학으로 잴 수 있는 것에 대해선 그렇다. 근데 사람이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경제학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뭔가 배가 아프다. 친구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왠지 짜증난다. 저 사건이 내게 미치는 경제적 악영향(전체 부의 감소, 대학 정원 수)에 비해 훨씬 더 짜증난다. 대체로 사람은 경제적 유인보다, 열등감이라던가, 죄책감, 성욕, 재미 같은 굉장히 합리적이지 않은 것에 끌리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이건 농담인데) 수요와 공급을 배운 경제학도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절반 정도는 경제학 전공을 포기해야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정말 경제학을 진지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그 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다. 절대적 기준에서의 풍족함을 위해, 상대적 기준에서의 가난의 기준치도 함께 높아졌다거나, 중산층이 없어지고 있고, 상류층의 일상을 보기 쉬워져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쉬워졌다 뭐 이런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반대이거나, 서로가 양성 피드백을 주는 관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시하기 위해 명품을 사는 부자는 본 적이 없지만, 과시하기 위해 명품을 사는 평범한 사람은 무척 많이 봤다. 간접적 피어 프레셔는 있지만, 직접적 압박은 난 느껴본 적이 없다. 반대로, 무척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인생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원인은 개인을 옥죈다.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집이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새로 생긴, 신축 아파트였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네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컸고,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친구네 엄마는, 내가 어디 사는지 물어봤다. 나는 X동(임대아파트 단지)라고 얘기했다. 집에 돌아가서, 우리 엄마한테 우리 집은 YY이 집보다 왜 이렇게 작냐고 물어봤다. 다음날, 그 친구는 자신의 엄마가 나랑 놀지 말라 얘기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랑 나는 다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암튼 뭐, 이런 경험은 흙수저라면 다들 적어도 수십개씩은 갖고 있다. 요즘 흙수저 집안에서 애 낳으면 생기는 일이, 가난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잘 적어놨다.
아무튼 보통 이런 삶을 살아오면, 이르면 중학생이 되서, 조금 늦으면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남들과 제법 다른데, 아마 이게 집에 돈이 없어서인 것 같다”라는 사실에 대해 깨닫게 된다. 계기는 많을 것 같다. 왠지 부모님이 내가 수학여행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던가,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서, 급식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신청하는게 좋겠다고 귀뜸해주거나 하는 경우면 운이 정말 좋은 편이다. 조금 더 잔혹한 경우는, 새로 사 신고 간 신발이 Converse가 아니라, Canverse라던가, 혹은 Everlast라던가 하는 경우라던가, 어디 놀러 가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친구가 내게 (자기 딴에는 나를 배려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까?) “좀 비쌀 수도 있어…“라고 얘기하는 것으로도, 그런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다행히도 운이 좋았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학군이 아주아주 별로였고, 일진한테 몇번 맞은 것 이외에는 가난하다는 생각을 그다지 하지 않아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는 공고를 나왔다. 현실적으로, 집이 정말 가난하지 않으면 공고에 결코 진학하지 않으므로… 가난이 만드는 벽을 내가 어느정도 이성적일 수 있는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느끼게 되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만약 지금이 18세기였다면,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내가 보고 열받아 할 사람이 근처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들과 나는 같다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니까.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상대적 박탈감은 상대를 알고, 상대가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 계층에게 접점이 있다는 것은, 계층간 이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운동선수나, 연예인 같은 보편적이지 않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가장 좋은 예는 교육이다. 이를테면, 고졸인 부모의 자식이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기업에 취직한 뒤에, 재산을 일구어 중산층에 정착하는 일들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불평등이 점차 사라져간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했는지와는 별개로).
나를 포함한 20대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번째로는 지금 사회에 남은 불평등을 점차 줄이고, 능력과 노력에 따른 공정한 결실을 맺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부모 잘 만났기 때문에 고등학생 때 대학교에서 실험과 연구 비스무리한 것을 해볼 수 있었다던가, 점점 더 괴상해지는 입시 문제에, 학원 뺑뺑이가 아니면 도저히 합격할 수가 없는 과학고 입시라던가, 연예인 자식은 텔레비전에 아주 쉽게 등장해서, 가난한 연습생이 그토록 원하는 기회를 손쉽게 얻는다던가 하는 일들. 불법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그 기회를 가지지 못한 자에겐 혐오스럽고 불공정하게 느껴질 것이다.
두번째는, 비록 저 새끼가 돈이 좀 많아서, 부모 능력으로 좀 잘 나가더라도 뭐…, 개인의 행복한 기준을 충족할 정도의 삶은 내 부모의 재산과 상관없이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말로는, 내 새끼한테는 내가 했던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지금 20대들이 싫어하는 부모들의 생각과 같다.
(사실 둘 다 틀릴 수도 있는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교육에서?
(내가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한) 교육 문제에서 특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모두가 비교적 평등하게 교육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를 뒤집어버릴 정도로 부유한 사람도 꽤 있긴 하지만, 쨌건 같은 지역 내에서는 돈이 많건 적건 비슷한 중고등학교를 배정받게 된다.
References
[1] Kahneman D. Thinking, fast and slow. Macmillan; 2011. [2] Pychyl TA. Solving the procrastination puzzle: A concise guide to strategies for change. TarcherPerigee;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