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의 일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항상 생각해왔던 것을 잊지 않게 간단하게 적어두려 한다.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먹고 살 정도의 소득이 있는 것, 때로는 열심히, 때로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일, 친구, 취미가 있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목표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조울증 환자로서, 피할 수 없이 이따금 무기력해지는 날들이 있다. 잠을 못 드는 시간이 길어지면 낮에 피곤해진다. 낮에 피곤해지면 짜증을 쉽게 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쉽다. 일의 페이스를 유지해지기 어렵고, 즐거운 일도 즐겁지 않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이 오지 않게 최대한 막고, 오면 최대한 빠르게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내가 갖고 있을 때는 좀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없어져서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회사에서 잘린다거나 하고 나서야 매달 들어오는 월급의 소중함,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내 정신에 미치는 (대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경험에 의해) 믿는 편이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더 심오한 목표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게 된다.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선 삶의 기본적인 것이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더 소중하다.

목표를 생각할 때 정량화될 수 있는 가치만 주로 고려하다가 정성적인 목표는 간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정성적인 목표 중에 가장 놓치기 쉬운 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 같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가장 힘들었던 점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어떤 날은 한국어로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해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서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말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이 점은 내가 이직할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지만, 나를 가장 곤란하게 한 문제였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성공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뭐 그렇다고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단지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즐겁다. 친구랑 특별한 목표가 없는 (일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대체로 목표가 있다.) 실없는 대화를 할 때 나는 대체로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적당히 어려운 일을 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적당히 어려운 일을 할 때 기분이 좋다. 이삼일 정도 머리를 싸맬 정도의 일이 내게는 맞는 것 같다. 이걸 못 풀면 죽을 것 같고, 화가 나고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게 (한 3일 정도는) 재밌다. 근데 그 고통이 더 길어지면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성취도보다 고통이 더 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이래서 나는 박사과정에 간다고 해도 그리 잘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너무 쉬운 일도 좋지 않다. 옛날에 편의점 알바를 했을 때 일인데, 일이 너무 지루해서 오히려 집중을 잘 하지 못했다. 쉬운 일이라고 요구되는 집중력이 더 낮은 것은 아니라, 시재가 너무 안 맞아 편의점 알바를 잘린 기억이 있다. 이는 노력하면 고칠 수 있는 습관이겠지만 사실 조금 더 어려운 일을 찾는게 더 재밌고 더 보상이 크다.

의사결정할 일을 줄이자.

내가 크게 신경쓰는 일이 아니면 선택지를 최대한 줄이자. 안드로이드 폰은 설정할 게 너무 많으니 아이폰을 쓰자. In the same vein, 리눅스보단 맥이 조금 더 낫다. 옷은 상하의 아무렇게나 입어도 어울릴만한 걸로 적당히 구비해 두자.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식사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바로 먹자.의지력은 상당히 제한되어있는 자원이고, 내 의지력은 내 삶을 되돌아봤을 때 명백히 평균 이하이다. 먹고사니즘 분야에서 남들 정도의 의지력과 판단력을 지니려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부분에서 의지력을 제한해야 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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