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나쁘지 않은 크리스마스. 책을 읽는게 재미있다. 해야 할 일을 내팽개쳐서 좋은 걸까. 하류지향이라는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생각난 김에 몇 가지의 책을 읽어봤다. 가끔, 책을 읽고 이렇게 살아야지 싶은 때가 있는데, 잠깐은 바뀌는 것 같은데 결국 원래대로 돌아오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가 같다면 그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라고 아마 앙드레 지드가 얘기했던 것 같은데… 저 기준대로라면 나는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암튼 그래서 찐따 내가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들었던 생각에 대해 적어야지.
기성세대가 불안한 이유
문학을 전공했거나, 문학을 좋아하던 사람에게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은 한탄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런 것 같다. 학창시절 국어선생님도 그랬다. 사람들은 점점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는다. 문학 대신 영화를 본다. 시 대신, 힙합을 듣는다. 랩을 한다. 요즘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월트 휘트먼이 아니라 밥 딜런이고, 윤동주가 아니라 블랙넛인 것 같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저런 기교도 전통도 얕아 보이는 것이 문학을 대체해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랜 시간동안 무언가를 즐기고 사랑해오기에 내 삶은 그리 길지 않았고 취미도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나마 내가 꽤 좋아했던 건 보컬로이드다. 하츠네미쿠를 좋아하는데, 요즘 씹덕들은 보컬로이드에 영 관심이 없다. 보컬로이드는 그냥, 새로운 작곡가가 보컬을 구하지 못했을 때의 임시방편이 되었다. 내게는 너무 안타깝다. 우타이테는 가수가 될 정도로 가창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스스로 곡을 만들 정도의 창의성도 갖추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음 따위. 심지어 노래를 만드는 쪽도, 페르소나을 구하게 되면 보컬로이드 따위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메인스트림으로 향한다. 실패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오지만.
사실 문학이 처음 시작했을 즈음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동양에서, 소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소설이라는 명칭은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 白雲小說』에서 처음 비롯되지만, 대개 패관문학(稗官文學)·패설(稗說)·패사(稗史)·야승(野乘)·수필 등의 포괄적이고 보잘것없는 속설로 인식되어 왔으며, 유학자들에 의해서 그 존재의미 자체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소설(小說))
서양에서의 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헛된 글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호도한다고 소크라테스에게 욕을 먹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천박한, 사실이 아닌 얘기를, 게다가 천박한 언어로 저술했다고 욕을 먹었다. 동양에서는 “성현들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젊음을 바치기는 커녕, 괴력난신한 이야기에만 골몰해 있다.”나, 서양에서는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통속적인, 한순간의 재미만을 추구한다.”는 얘기를 소설가들은 정말 많이 듣지 않았을까?
소설은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신학의 다른 표현이나, 혹은 극작품의 대본이라는 가림막을 통해 성장했고, 성장한 뒤에는 그들을 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현대의 매체가 문학을 대체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뿐이라 생각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이라는 표현은 이런 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 자식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즐기고 열광하고 있다.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내가 아는 ‘인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얘기를 적는 나만 해도, 인터넷 방송을 즐겨보는 사람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은 변해가고, 30년을 채 살지 않은 나도 새로운 문화의 주류에 밀려나는 형편이다. 이런 변화가 더 느렸으면 좋겠다. 혹은, 변화의 와중에도, 한켠에 나와, 나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리가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에픽테토스, 데카르트, 니체.
너는 올림피아 경기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가? (중략) 그것에 앞서는 것과, 뒤따르는 것을 잘 살펴본 뒤에 그 일을 시작하라. 잘 훈련해야만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하고, 맛있는 음식도 삼가고,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정해진 시간에는 하기 싫더라도 훈련해야만 한다. (중략) 이것들을 다 고려했을 때조차 여전히 이를 원한다면 너는 운동선수가 되는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 때는 레슬링 선수가 되었다가도, 검투사가 되었다가도, 다른 때에는 음악을 하려다가, 그 다음에는 연극을 하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처럼, 너는 돌아서게 될 것이다. 결국, 너의 온 영혼을 바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 꼼꼼히 따지고, 살펴보며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되는대로, 한 순간의 흥미로 그 일을 착수했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앵케리디이온, 29장 중 일부.
나의 두번째 원칙: 비록 엄청 의심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하기로 결정했으면 100% 확신을 갖고 있고, 확실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떠돌이 나그네가 이곳저곳 방향 없이 돌아다니는 것 보다,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 낫듯이. 나의 세번째 원칙: 내 운명을 지배하기보다는, 내 자신을 지배하려 애쓰도록 하자. 세상의 원칙과 질서보다, 내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 더 쉽다. - 데카르트, 3장, 방법서설.
깊은 고뇌를 겪은 인간은 정신적인 긍지와 역겨움을 갖는다. 얼마나 깊게 고뇌할 수 있는가에 따라 사람의 수준이 정해진다. 깊은 고뇌를 겪은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뇌 덕분에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인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멀고도 무서운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런 세계에 한때 살았었다는 전율할 만한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소리 없는 정신적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고뇌하는 자이며, 인식의 선민의식을 갖는 자는, 주변의 동정/관심으로부터, 다른 말로는 자신과 같은 고뇌와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짙은 변장이 필요하다. - 니체, 선악을 넘어서. (어디더라).
별로 나한테는 무의미한 글들
이런 글을 읽어봤자 내가 더 성실해진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가장 성실한 사람은 지금도 도서관, 혹은 연구실에서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고, 오후 4시쯤 일어나 합정역 5분거리의 3평짜리 방구석에서 비트를 만들고 있을 래퍼 지망생이고, 아마 데카르트나 니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성공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모를 사람이 가장 성공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운동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가끔 생활체육인과 엘리트 체육인의 대화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얘기가 하나 있다.
생활체육인: 이 운동 어떻게 해요? 어디 운동이 어디에 좋아요?
엘리트체육인:아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하면 되요…
암튼, 지식은 실천이 아니다. 실천도 지식이 아니다. 아무튼, 그래서 내 하찮은 독서는 공부하기 싫은 사람의 도피 같은 것이다. 롤을 하는 것과 비슷한데, 롤은 누군가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 힙스터짓을 조금은 하고 싶어서 독서를 찾는 것이다. 아무튼 좋아하는 만화의 팬픽을 쓰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한 마음으로 글을 적어본다면, 의 이야기다. +실제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나를 칼로 찌르고 싶어질 정도의 헛소리.
체리피킹일 수도 있겠지만, 옛날엔 노력 자체를 멸시하는 분위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노력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다. 사실 나도 그리 노력하고 싶지 않아졌다. 별 근거는 없지만 생존의 위협이 없는 자유가 있어야 좀 노력을 긍정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예전엔 귀족들에게나마는 생존의 위협 없는 자유가 있었던 것 같다. 요즘도 일부의 사람에게는 생존의 위협 없는 자유가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존의 위협이 없는 자유는 먼 길인 것 같다. 다만, 예전의 자유 없는 자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바뀐 것 같다.